본문 바로가기

성공회 소개

성공회 이야기

성공회 이야기
(성공회와 역사 그리고 사람들)


헨리8세 이야기

헨리 8세

 성공회에 대해 아예 모르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헨리8세가 이혼하려고 성공회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공회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주로 하는 이야기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엄밀히 따지면 사실과 다른 이야기 입니다.

 헨리8세는 매우 보수적이며 열성적인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성공회가 태동되기도 했지만 그 스스로는 죽을때까지 가톨릭의 전통을 지켰습니다.

 형수와 결혼했던 헨리는 결혼이 성경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여 형수와의 결혼을 허가한 교황의 처사를 취소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교황과의 정치적인 문제로 거절당하여 결국 교황의 관활에서 벗어나 잉글랜드 교회의 허가를 받아 엔폴레인을 정실로 맞았습니다.

 여기까지는 외부로 드러나는 역사의 단편입니다.

 좀 더 실제적인 내용을 들여다 보면 잉글랜드는 독립적인 민족교회가 있었으며 성서를 스스로 번역하는 등 로마 가톨릭 교회와는 다른 기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가 부패해 감에 따라 교회와 국민의 저변에는 새로운 영국교회의 태동을 요구하고 준비하는 움직임들이 점점 퍼져나갔습니다. 또한 루터의 사상을 담은 서적이 확산되고 교회 개혁의 움직임이 활발해져 헨리의 뒤를 이은 에드워드의 치세 동안 잉글랜드 교회는 프로테스탄트 쪽으로 개혁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탄압과 개혁의 과정을 거쳐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에야 비로서 영구적으로 로마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오늘의 성공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헨리8세는 표면적으로는 잉글랜드교회(성공회)를 로마교회로부터 분리한 사람으로 인식되지만 오히려 성공회를 탄압하였고, 실제적인 분리와 잉글랜드 교회의 체계를 정립한 사람은 엘리자베스 1세입니다.

 성공회를 단지 국왕의 이혼 과정을 위한 산물 정도로 보는 것은 매우 단편적이고 오류가 많은 시각입니다.


사제와 결혼

 성직자에는 수도 성직자와 재속 성직자가 있습니다. 수도자 중에는 서약을 하고 수도 생활을 하는 수사, 수녀가 있고 성직을 받은 수사 사제가 있습니다. 재속 성직자는 세속 사회에 나와서 중생과 함께 중생을 위해 일하는 주교, 사제, 부제가 있습니다.

 성공회의 재속 성직자는 결혼할 수 있습니다. 그 근거는 신약성서입니다. 사도들이 교회를 감독하던 초기 교회 시대에 성직자의 독신제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바울로가 독신을 권하기는 했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천주교 역시 독신제도에 대해 신법이 아닌 교회법이라고 결론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주신 법이 아닌 교회의 법이기 때문에 고쳐질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성공회 워싱턴 국민 대성당 :
미국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는 곳

 미국 대통령 취임식날 첫번째 일정은 성공회 워싱턴 국민 대성당 (http://www.national cathedral.org) 에서 시작됩니다. 대통령의 이,취임식이 이 곳에서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미국 성공회 워싱턴 교구 주교좌 성당이며 링컨 대통령의 장례식을 치른 이후 취임 축하 및 조찬 기도회, 대통령 장례식 등이 열리는 곳입니다.

 워싱턴 국민 대성당은 "종교를 뛰어 넘어 누구나 기도할 수 있는, 모든 국민의 행사를 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자"는 취지로 건립이 시작되었으며, 단 한푼의 정부 지원 없이 개인과 기업 등의 후원을 통해 93년의 기간에 걸쳐 건설되었습니다. 미국인들이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백악관 다음으로 좋아하는 건축물이기도 합니다.


투투 대주교 :
노벨평화상 수상자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 Desmon (Mpilo) Tutu 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 차별을 반대하는 운동에 이바지한 공로로 198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코사족과 츠와나족 부모에게서 태어나 그리스도교 계통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의사가 되고 싶었으나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교사가 되었습니다. 교사직을 그만 둔 후 성공회 교구 사제로 임명되어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신학교에서 강의하였습니다. 1960년대 말 런던으로 유학해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1972~75년 세계교회협의회( WCC)의 부의장을 지냈으며, 1975~76년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요하네스버그 대성당의 수석사제가 되었습니다.

 1978년 남아프리카 교회협의회 의장에 임명되었고, 남아프리카 흑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주요 대변인이 되어 비폭력 저항을 강조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한 경제압력을 가하도록 교역국들에게 촉구하였습니다. 또한 흑인 및 백인 공동체 간의 평화로운 협상을 통한 화해를 모색하였습니다.

 1985년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요하네스버그 성공회 주교로 임명되었고, 1986년 역시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케이프타운 대주교가 되어 160만 명의 신자가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성공회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1982년 강의 모음집 <하느님의 뜻 The Divine inention>, 1983년 설교 모음집 <희망과 고통 Hope and Suffering>이 출간되었고, 1994년의 넌픽션 <하느님의 무지개 백성: 평화로운 혁명을 위하여 The Rainbow People of God: The making of a Peaceful Revolution>는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켄터베리 대주교 :
영국성공회의 대표자

 성공회 관련 기사나 내용을 보다보면 켄터베리 대주교를 언급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켄터베리 대주교는 영국 성공회의 대표자 역할을 합니다. 성공회가 영국에서 시작되었으니, 전세계 성공회 대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각 관구의 성공회는 캔터베리와 기본적인 신앙적 입장을 같이 하고 교류할 뿐 지배나 간섭을 받지는 않습니다.

캔터베리 대주교 관사 입구

 세계 성공회의 여러 기구와 협의회는 협의된 사안에 대하여 결의문을 채택하고 그 내용은 전 세계 성공회에 권고되지만 구속력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전 세계의 7천만 성도의 교세를 가진 교단이 어떠한 강제적인 구속력 없이도 문화와 지역적 차이를 넘어서 신앙적인 일치와 교류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신앙의 사랑과 관영이며 성공회의 대표적인 매력입니다.



'성공회 소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공회의 장점  (0) 2013.09.07
성공회란?  (0) 2013.09.05